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콤니노스 왕조 (문단 편집) === 첫 황제를 배출하다 === 마누일 에로티코스 콤니노스는 자식으로 이사키오스, 요안니스와 딸 한 명을 두고 사망하였다(1020년). 자식들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기에 마누일은 자신의 사후에도 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이들을 당시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위탁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충직한 신하의 자식들을 황궁에서 교육시켰다. [[바실리오스 2세]]의 의향에 따라 군사귀족으로 성장한 마누일의 장남 [[이사키오스 1세|이사키오스]]는 장년에 들어서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이던 [[테오도라(11세기)|테오도라]]가 죽고 양자로 들인 '노인' [[미하일 6세]]가 새로이 황제가 되었는데(1056년), 그는 지방 군사귀족을 억누르는 경향을 보였다.[* 지역 방위와 군사력을 책임지는 지방 군사귀족이 뭐가 잘못이냐는 의문이 들법하지만,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서 공격하기 까다로운 군벌들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등 골치를 썩혔다. 거기에 당시 제국은 11세기 중반 사방의 외적과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한 군대로 인해 엄청난 군비로 신음하고있는 상황이었던지라... 애초에 콤니노스 가문도 지방 군사귀족으로 시작하여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먹었다.] 문제는 군축에 반발하여 저항할 군사귀족들을 억누를 혈통적인 정통성이 없어서 황권이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황제에게 반발한 군사귀족들[* 후에 황제가 되는 [[콘스탄티노스 10세|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니키포로스 3세|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 명장 카타칼로노스 케카프메노스, 로마노스 스클리로스, 미하일 부르치스, [[로마노스 3세]] 아르이로스의 아들들.]의 반란에 가담한 이사키오스는 반군의 황제로 추대되었고 자신의 영지였던 파플라고니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진군하였다. 미하일 6세는 진압군을 파견하였으나, 이사키오스는 그가 동원한 동부 타그마와 관구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정도의 혈전 끝에 진압군을 격파하였다. 미하일 6세는 궁지에 몰렸고, 본래 황제와 사이가 나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 [[동서 대분열]]의 그 사람이며,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친척이다.]가 개입하여 황제는 폐위 되었다. 활짝 열린 수도의 성문을 지나친 이사키오스는 시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콤니노스 가문 최초의 황제 '''이사키오스 1세'''로 즉위하였다(1057년). 그러나 가문 첫 황제의 재위는 짧았다. 자신이 황제의 등극에 개입했던 총대주교는 교회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에 개입하려하였고, 재정복구를 위해 교회재산을 보태라며 총대주교와 마찰을 겪은 황제는 사임을 요구하는 등의 갈등 끝에 총대주교를 추방시켜버렸다. 결국 교회의 지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의 인기를 상실한 황제는 대(對) 페체네그 원정에 나서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나 얼마 안가 사냥에서 부상을 입게 되어 결국 황위 양도를 결정한다. 처음에는 동생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부친인 스콜라이 연대장(Domestic of the Schools) [[요안니스 콤니노스]]에게 황위를 제의했으나 요안니스가 거부하자[* 아내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모후인 [[안나 달라시니]](Anna Dalassene)는 남편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겼었고, 이것이 좌절된 이후 아들들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 대단히 고생했다.] 친 두카스파 관료인 미하일 프실로스의 권유로 [[콘스탄티노스 10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되었다(1059년).[*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했음에도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한 점은 특이할만하다. 그러나 제위 찬탈이라는 위험한 선례를 남겨 이후 제국 정부의 약화와 맞물려 1070년대의 쿠데타 잔치를 불러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